1959년 작은 노점을 만들어 모자 70개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중견기업이 있다. 전 세계 모자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안모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쟁 고아, 모자가게 사장되다
영안모자를 창업한 백성학 회장은 전쟁통에 고아가 된 뒤 온갖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모자공장에 취업하게 됐다. 3년 간 모자공장에서 일을 배운 그는 19세가 되던 시기, 청계천에 모자를 파는 노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던 당시 썼던 복장이 인기를 끌면서 모자도 덩달아 인기가 많아졌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5.16 군사정변이 터졌고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재건복을 입도록 지시하면서 중절모 판매량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백 회장은 굴하지 않고 폐업한 모자가게를 인수해 오히려 사업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후 1962년 화폐개혁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던 시기, 다른 모자 상인들과 달리 백 회장은 그동안 쌓아둔 재고를 풀며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환으로 받은 현금은 이내 다 바꿀 수 있었고 백 회장은 그때 당시 확보한 여유자금으로 사업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일찌감치 수출에 전념, 사업다각화 통해 모자 시장의 한계 극복
1966년 일본에 첫 수출을 시작한 영안모자는 곧이어 미국까지 진출하게 됐다. 1969년에는 미국 월마트에 들어갈 모자 60%를 생산해 납품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안모자는 수출에만 전념했고 그때 당시 만든 LA다저스 모자가 대박을 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자에 들어가는 원단, 부자재 공장을 세워 모자 단가를 낮췄고 1980년대에는 해외 공장까지 세웠다. 지금은 모자 1억개를 만드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사업 다각화에 나서면서 파산 위기에 처한 대우버스, 지게차 업체 클라크를 인수했다. 인수한 회사는 백 회장의 손을 거쳐 다시 회생했고 현재는 영안모자 계열사 중 가장 많은 매출을 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0년대에는 OBS경인TV와 숭의학원 등을 인수해 미디어, 교육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현재는 전 세계 60여 개의 법인을 가진 글로벌 중견기업이 됐다.